18세기에 중국은 미국과 미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가졌다. 당시 양광총독(1817∼26) 완원(阮元)은 미국인들이 (중국의 관습과 법을) 제일 잘 존중하고 준수한다고 극찬했다. 1841년 서계여(徐繼?) 푸젠(福建)성 총독 또한 이들을 천성이 좋은 순종적이고 진실한 이로 묘사했다.
이런 중국인들의 호감은 식민지 배경에서 비롯된 미 정부 정책에 순종한 미국인의 역할에서 비롯됐다. 중국은 미국의 첫 중국 영사 새뮤얼 쇼(1786∼89)를 통해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갓 독립한 신생국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중국이 미국인을 ‘새로운 사람’, 미국을 ‘화려한 국기의 나라’로 인식한 연유다. 미국의 스토리를 들은 중국 측은 61번의 수정을 통해 미국에 ‘아름다운 나라(美國)’로 중국 이름을 지어줬다.
미 정부 정책의 기조는 1843년 존 타일러 대통령이 황제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알려졌다. 미국이 상호존중과 현명한 행동으로 관계 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1845년 제임스 뷰캐넌 국무장관도 공사에게 중국의 요구를 존중하고 중국이 점차 우호적으로 신뢰하게끔 만들 것을 명했다. 식민지 출신으로 중국 영토에 야욕이 없음을 분명히 할 것을 잊지 않았다.
아편무역이 고조될 때 선교사들은 미 상인에게 자제를 요구했다. 근절할 수 없었지만 이들은 미 사업가와 중국의 교육과 사회 기반 건설에 앞장섰다. 중국에 대학교, 등대, 전보 통신과 철도의 건립을 주도했다. 중국의 신뢰는 영국과의 첫 아편전쟁(1842) 때 미국에 동맹을 모색할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이는 미국인의 등용으로 이어졌다.
총리아문의 동문관 운영을 선교사 마틴에게 25년 동안 맡겼다. 앤슨 벌링게임 공사는 1868년 중국의 첫 미국 사절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이런 분위기는 사라졌다. 중국 이민노동자가 미국인 일자리를 탈취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핍박이 강해지면서였다. 1882년 이들의 미국 이민금지가 입법됐다. 중국인의 미국인 일자리 잠식 의식이 처음 생긴 것이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